카지노 : 오후 4시16분이 되자 알람이 울렸다. 문종택 감독이 말없이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보여주었다. ‘우리 지성이’라는 짤막한 한 줄이 쓰여 있다. 딸을 떠나보내고 10년간 매일 “전화 오듯” 알람이 대신 울렸다. 손에 쥔 휴대전화 케이스에 붙은 ‘416TV’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눈에 들어온다. 그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이름이다. “국가도 안 나서, 기자도 안 나서, 그러니 내가 해야지.” 4월1일 서울 종로구에서 만난 문종택 감독이 말했다. 단원고 2학년 1반 지성이 아빠는 세월호 참사 이후 카메라를 들었다. 다큐멘터리 〈바람의 세월〉은 그 문장에서 시작한다.

재원 : 문종택씨가 처음 카메라를 든 건 2014년 8월8일이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유가족들이 단식에 나서자 일베 회원들이 ‘폭식 투쟁’을 하는 등 “온갖 모욕으로 뒤덮여 있던 시절”이었다. “한 번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저들과 어떻게 싸우고 맞설까, 어떻게 돌파할까 온종일 거기에 꽂혀 있다 보니까.” 지금처럼 라이브 방송이 활발하지 않을 때라 인터넷 연결이 수시로 끊어지기도 하고, 영상이 나가는 줄도 모르고 혼자 떠든 적도 부지기수였다. 그런데도 언젠가부터 현장에 가면 “우리 카메라 왔다” “지성이 아빠 왔다” 하는 소리가 들렸다. “카메라가 있어서 조금은 안전해졌다”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 얘길 들으면 힘이 나더라. 그게 아니었다면 진작에 때려쳤을지도 모른다.” 문종택 감독이 말했다.

그렇게 쌓인 영상들이 5000여 편, 50테라바이트에 달하는 분량이다. 대형 방송사나 수사기관에도 없는 영상들이 그의 외장하드에 있는 셈이다. 이전에도 영화로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문씨는 매번 거절해왔다. 상업적으로 이용될까 봐, 유가족에게 비난의 화살이 가해질까 봐서다. 다만 찍어야 한다면 “우리 영화”였으면 했다. 그간 세월호 참사를 다룬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있었지만 오롯이 유가족이 지난 10년간 걸어온 길을 되짚는 기록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 아이들, 우리 엄마 아빠들, 피는 안 섞였지만 우리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미디어 활동가인 김환태 감독이 문종택씨의 연락을 받은 건 2022년 10월이다.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의 세월호 3주기 프로젝트인 ‘망각과 기억 2: 돌아 봄’에 참여하면서 문씨를 처음 만났다. “가족들 중에서 카메라를 든 유일한 분”이었기에 미디어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했다. 처음엔 이 작업을 감당해낼 자신이 없었다는 그가 생각을 바꾼 건 고 박종필 다큐 감독 때문이다. 오랫동안 세월호 영상 기록 작업을 해오던 박종필 감독은 2017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종필이 형이 찍고 싶었던 인물이 아버님(문종택)이었고, 마지막까지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걸 알기 때문에 거절할 수 없었다.” 김환태 감독은 박종필 감독을 대신해서 작업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바람의 세월〉은 지성이 아버지가 기록해온 영상 위에 정부의 책임을 따지고 재발 방지책을 요구해온 세월호 가족들의 발걸음을 담담히 그려낸다. 세월호특별법 제정 요구부터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선체조사위원회, 다시 사회적참사 특별조사위원회(사참위)까지 시기마다 유가족들의 외침이 있었다. 누군가는 이쯤 되면 충분한 게 아니냐고 묻는다. 영화에 인용되는 사참위 보고서의 한 대목은 이렇다. ‘국가는 구조에는 한없이 무능하다가도 책임 회피와 여론 조작에는 놀랄 만큼 유능했다. 책임자를 위한 보고는 많았지만 책임 있는 조치는 없었다. 무책임은 조직적이고 책임 방기는 집단적이었다. 위로 대신 탄압하고 지원 대신 감시했다.’ 참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건, 여야를 가리지 않는 일이었다고 문종택 감독은 말한다.

영화에는 추모 공간을 지키는 게 왜 유가족들에게 그토록 중요했는지, 배·보상 문제가 어떻게 유가족 사이에 분열을 초래했는지 같은 상황도 드러낸다. 김환태 감독은 날 선 반응이 오가는 장면은 빼야 할까 고심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결국 국가의 책임 방기 속에서 빚어진 비극이란 문제의식 때문이다. 무엇보다 유가족이라는 이유로 쉽게 울거나 웃지도 못하게 만드는 편견을 깨부수고 싶었다. “가족들도 굉장히 다양한 감정을 갖고 살아가는 일상적 존재다. 이들이 감정을 드러내고 갈등을 봉합하는 과정들을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옆에 있던 문종택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해 12월 유가족들을 대상으로 점검 시사회를 거쳤는데, 영화를 본 이들은 “그때 돌도 씹어 먹겠더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만큼 결기 있는 모습이었다.원래는 기자들이 했어야 하는 일

김환태 감독은, 촬영 당시엔 아주 우연히 카메라 필름에 담겼지만 시간의 두께 속에서 그 우연이 전혀 다른 의미로 전이되는 순간들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2017년 정권이 바뀌면서 언론사 카메라가 떠나고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시기들이 있었는데, 당사자로서 꿋꿋이 현장에 남아 기록했다. 카메라라는 게 별거 아닌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났을 때 의미가 생긴다. 그게 또 다른 활동을 해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 같다. 아버님이 그런 역할을 한 것이다.” 김 감독은 지성이 아빠의 우직함이 만들어낸 기록이 이 영화를 떠받치고 있는 토대라고 본다.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영화에서 카메라가 기울어지는 장면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지성이 아빠가 김 감독에게 넣어달라고 요청한 장면이다. 영화의 첫 장면, 흐드러지게 핀 벚꽃을 비추는 화면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기운다. “그 벚꽃 하나하나가 꼭 우리 아이들 같다. 흔들리는 벚꽃을 보며 여전히 세월호가 진행 중이라는 의미가 충분히 녹아 있었으면 했다.” 문종택 감독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게 아니라 심장으로, 가슴으로 볼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밝혔다. 김 감독은 “아버님의 마음이 표현되는 장면”이라 해석했다. 그 이후로도 카메라는 두 차례 더 흔들린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장면은 넣지 않았다. 영화를 통해서 참사를 자극적으로 소비하고 싶지 않았다. 문종택 감독은 언론이 무의식적으로 참사를 재현하는 태도에 문제의식이 깊다. “어떤 대형 사고가 나면 세월호가 침몰하는 영상이 관성적으로 쓰인다. 세월호가 침몰하는 게 사고의 표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 쓰일 텐데, 그런 방송사에 한번 물어보고 싶다. 당신들이 세월호를 아는가? 진상규명이 어떻게, 어디까지 왔는지 아는가?”

‘세월호 참사 이후 평범했던 아버지가 카메라를 들었다’는 소개로 시작하는 다큐멘터리는 필연적으로 기성 언론의 책임을 묻게 된다. 문 감독은 지난 10년간의 기록이 ‘기자들이 했어야 하는 일’이 아니냐고 말한다. “사회적 참사라고 말을 하는데 5년이 지나니까 다들 잊는다. 언론은 그러지 않았다고 하는데, 방치한 것과 다름없지 않나. 기자회견을 하는데 기자가 없더라.” ‘우리 영화’를 만들겠다는 세월호 가족들의 다짐은 결국 나머지 사회를 위한 영화로 이어진다. “많은 분들이 ‘우리도 아픈데 당사자 마음은 오죽하겠냐’고 말한다.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각자의 피해가 있을 것이다. 누구의 아픔이 더 크다 작다로 말할 수 없는.” 지성이 아빠 문종택 감독은 그저 영화가 슬펐다는 후기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해 각자의 역할을 고민하는 질문이 많아지길 바란다. 10년간 만들어온 한 아버지의 우직한 기록이 앞으로의 10년을 묻고 있다.기자명김영화 기자다른기사 보기 [email protected]#바람의 세월#문종택#김환태#시네마달#세월호 10주기#세월호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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