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 그가 어김없는 사람이라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출근 시간을 어긴 적도 없고 퇴근 시간을 어긴 적도 없다. 늘 같은 양복을 입고 같은 표정을 짓고 같은 자리에 앉아 일을 했다. 그저 모든 게 적당하고 평범해서 줄곧 무탈한 인생. 런던 시청 공무원 윌리엄스(빌 나이)의 삶.

재원 :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어제는 조퇴, 오늘은 지각.” 직원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어제는 퇴근 시간을, 오늘은 출근 시간을 어겼기 때문이다. ‘어김없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모든 걸 어기는 사람으로 변해버렸다. 아무래도 윌리엄스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실은… 내가 살날이 얼마 안 남았어요.” 아마도 6개월, 길어야 9개월. 얼마 전까지 같은 부서에서 근무하다 최근 직장을 옮긴 옛 부하 직원 마거릿(에이미 루 우드)을 만나 처음으로 털어놓은 이야기. 하나뿐인 아들에게도 아직 알리지 않은 소식을, 별로 친하지도 않았던 직장 동료에게 먼저 전하는 윌리엄스. 살다 보면, 별로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서 도리어 마음 편히 털어놓을 수 있는 비밀도 있다는 걸, 그는 이제야,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에야,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귀갓길에 멈춰서 애들 노는 걸 본 적 있어요? 거리나 공터에서 놀다가 때가 되면 엄마가 집에 오라고 부르죠. 보통은 마지못해 가거나 가기 싫어서 반항을 해요. 애들은 그래야죠. 그렇지 않은 애들보다 훨씬 나아요. 다른 애들과 못 어울리고 구석에 홀로 앉아 있는, 딱히 행복하지도 그렇다고 슬프지도 않은 애들 있잖아요. 엄마가 자기를 부르기만 기다리는 애들이요. 내가 그런 아이일까 봐 두려워요. 그렇게 살다가 끝나는 건 정말 싫거든요.”

영화 〈리빙: 어떤 인생〉을 보다가 나도 ‘그런 아이’가 아닐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김없고 틀림없는 매일에 안도하며 그저 적당해서 결국 지루해진 내일로 순순히 따라 나선 아이일까 봐, 하루하루 살아간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채는 어른일까 봐, 나도 덜컥 겁이 났다. 윌리엄스의 선택이 궁금해졌다. 점점 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톨스토이의 소설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영감을 얻어 만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이키루〉(1952)를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다. “(어릴 때 본) 이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의 영향 아래에서 평생을 살아왔다”라고 고백하며 직접 원작을 각색했다. 〈러브 액츄얼리〉와 〈어바웃 타임〉의 배우 빌 나이가 주인공을 맡았다. 참 좋은 각본이 참 좋은 배우를 만나면 굳이 뭘 더 애쓰지 않아도 이미 근사한 영화가 되어 있는 법이다. 바로 이 영화 〈리빙: 어떤 인생〉처럼.

흔해빠진 ‘시한부 인생 스토리’가 아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 어려운 질문에 정성껏 답안지를 작성하는 영화다. 나도 나만의 답안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이야기다. 특히 영화의 후반부. 너무나 아름답게 마무리 짓는 스토리텔링에 감탄하고, 또 감동한 나는, 결국 혼자 이렇게 속삭였다. “아… 너무 좋다, 이 영화.”기자명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다른기사 보기 [email protected]#리빙: 어떤 인생#이키루#빌 나이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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